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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4 청춘영화와 여성관객성 1
  2. 2008.06.12 못난 글쓰기
  3. 2008.06.09 약지
  4. 2008.06.06 반성의 시간
  5. 2008.05.28 내가 할 수 있는 건
  6. 2008.05.27 BYE BYE
  7. 2008.04.30 감각의 문제
  8. 2008.04.27 롱 러브레터 표류교실
  9. 2008.04.16 留学
  10. 2008.04.09 정체감 1

청춘영화는 흔히 하위 장르, 혹은 장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며 장르론자에게 홀대받는다. ‘청춘’이라는 것이 소재적인 차용일 뿐, 내용상으로나 형식상의 공통분모를 도출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라고 하는 것을 단일하게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쩌면 장르에 매여 장르를 분류하는데 공을 들이는 건 무의미한 메아리가 아닐까? 어떤 장르라도 ‘장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속성을 동등하게 공유할 수 없으며, 단 한 가지 장르적 속성만을 가지고 있는 영화도 최근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장르는 이상한 방식으로 곁가지를 친다. 코믹 멜로, 액션 느와르 등의 복합 장르를 표방하는 영화들. 혹은 장르를 비트는 장르 영화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단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장르 무용론을 펼쳐야 할까? 그랬으면 싶지만, 애석하게도 장르는 여전히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저 화려한 영화 홍보 문구들을 보라! 사실이 이러하다면, 이것이 정말 장르 영화냐 아니냐, 혹은 어떤 장르냐를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기보다 장르에 대한 기대 심리, 즉 장르영화의 관객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

 

다시 청춘영화로 돌아와보자. 청춘영화는 전통적으로 십대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진 장르이다. 당연히 그 소구층은 십대(젠더적이기보다 세대적인 층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스폰지를 비롯한 예술영화관들에서 청춘영화(특히 일본의 청춘영화들)는 여성관객들에게 환대를 받는 작품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스폰지는 극장 이전을 준비하며 자신들의 주 관객층인 2,30대 여성 관객들이 이탈해나가지 않도록 친히 ‘청춘영화제’를 마련하였다. 청춘영화의 무엇이 2,30대 여성관객들과 소통하는가?

물론 여성관객들이 이런 예술영화관의 주관객층이 되는 것은 비단 청춘영화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의 주소비층을 이루는 2,30대 여성들(특히 싱글일 경우)은 어디를 가든 환대를 받는다. (여성관객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꽤 강한 설득력을 얻으며, 통계자료에 인용되고 한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일견 그들의 행위를 너무 경제적인 측면 안에서만 제약하는 논의는 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혹은 왜곡되어 있다.) 그녀들은 패션, 먹을 거리, 마실 거리, 놀 거리, 즐길 거리 들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다. 20대 초반이 주로 주인공이었던 TV 드라마에서는 2, 30대 싱글 여성들(<내 이름은 김삼순>, <여우야 뭐하니>,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의 노골적인 연애사, 직장에서의 고민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공연, 영화 할 것 없이 2,30대 싱글 여성들의 이야기(영화와 뮤지컬로 각각 만들어진 <싱글즈>가 대표적이다)가 만들어진다.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한 세미나에서 자신들의 극장 관객들의 80% 가까이가 여성이고, 그들 중 태반이 나홀로 극장을 찾는 이들이라고 하며 이들을 어떻게 안정적인 관객층으로 끌고 나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단순한 소비주체로서, 좀 더 특별한 문화적 취향들을 선호하는 것일 뿐(된장녀라고 부르며 비하하는 태도와 유사하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녀들의 행위의 긍정적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들이 단지 넉넉한 시간과 적지 않은 월급을 가지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문화활동이라고 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큰 흐름에 떠맡겨져서 극장을 찾는 것일까? 그렇다면, 청춘영화의 주 관객층이 2,30대 여성이 되고 있다는 게 의미하는 건 뭘까? 능동적인 소비주체로서 2,30대 여성의 현재 위치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도 말이다.

 

이천년대 후반, 남한 여성들의 삶.

신자유주의와 함께 고용불안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성별과 세대를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지만 특히, 전통적으로 비정규직이었거나, 혹은 일용직 노동 종사직이 많았던 여성들에게는 더욱 심각한 것이 된다. 여성의 전체적인 취업률은 과거(정말 과거의 일이다.)보다 많이 늘었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비정규직으로 다시 유입된다. 끝없는 고용시장의 불안.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 판타지는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기가 힘들다. (그것은 과거의 결혼 판타지의 실패와는 또 다른 문제다. 젠더를 막론하고 누구나 겪고 있는 삶의 총체적 불안정) 여기에 겹겹의 위기와 위험들이 여성들에게 겹쳐진다. 젠더 시스템 하에서 여성의 몰락은 남성의 그것보다 가혹하며 위험하다. 혹은 성공한 여성들에게조차 곳곳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경제적 추락의 위험과 신체적 몰락의 위험. 그리고 이런 위기의식은 불안한 듯 노출된 청춘들에게 시선을 옮기게 한다.

물론 이런 공모성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그 개연성의 여부를 수치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미래가 불투명한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불투명한 여성들이 비슷한 연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혹은 신체적 위협을 체감하고 있는 여성들이 신체적 위협이 적은 팬픽과 팬덤문화에 열광하는 것 역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조합이다.

첫 번째의 연대감은 그들이 시스템의 불안정성에 기민하게 반응(대응이 아니다!)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녀들은 이 시스템 안에서 불안해하고,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청춘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시스템 내부가 아닌 외부를 고민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밝은 미래> 등 - 은 두터운 여성 팬층을 확보한다.

두 번째의 팬덤은 강한 남성성을 내뿜는 스타를 열망하는 것과는 진행 양상이 다르다. 일상의 이미지들이 폭력과 선정성으로 가득하다면, 종종 청춘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은 여성화된 혹은 팬픽의 주인공들이 되어 이미지를 향유하게 된다. 즉 그들은 응시하는 주체가 아닌 스스로를 응시의 대상으로 만든다.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 그의 이런 이미지는 <형사>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후 그가 출연한 드라마, CF, 영화들 중에서 그의 여성성을 부각시킨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작품, 예를 들어 <매직>과 같은 드라마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 슈퍼주니어를 주연으로 만든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 등이 그러하다.

 

노스텔지어적 청춘 / 소통하는 청춘

흔히 남자아이들의 청춘은 자신의 순수성에 대한 보상으로 설명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랬고, <내 청춘에게 고함>이 그러했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남성화된 시선(그리고 관객성)과 남성 제작자들 사이의 공모다. 그러나 여자 아이들의 청춘은 이런 노스텔지어적 청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태풍태양>의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길 희망하고, 현재와 투쟁한다. 좀 더 오래 전 <세 친구>들은 보이지 않는 미래와 남다른 자신들의 미래를 고민했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의 자기 반성을 위해 돌아봐야 하는 청춘이 아니다. 불안한 청춘의 이야기는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그 지점에서 ‘청춘’과 ‘여성관객’은 서로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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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수업을 위해 급조해서 글을 썼다. 다음 주면 드디어 종강.
불성실함에 대한 가책을 느끼며,
마무리만은 잘 해 보겠노라 뒤늦게 밤을 샌다.
세상에, 제대로 미리 하는 것이라곤 도대체 없다.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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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긴 기사 하나를 작성했다.

짧은 호흡들에 익숙해 있던 탓인지,
잘 모르는 인물에 대해 써야해서였는지
글은 엉망진창인 채로
스르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좀 더 부지런해져야지.
아마 다음 주는 한 주 내내 괴로울 것 같다.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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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지

카테고리 없음 2008. 6. 9. 01:53
며칠 전, 문에 손가락이 끼어 왼손 약지를 다쳤다.
시퍼렇게 앞뒤로 피멍이 든 손가락.

멍이 들면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는 것도 알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왼손 약지가 의외로 많이 쓰인다는 사실도 알았다.

사이트에 접속하기 위해 www를 쳐야 하는 손가락.
기타줄 잡는 손가락.
테이크 아웃 커피 컵을 받쳐주는 네 번째 손가락.

상처는 곧 나을 것이고,
나는 또 상처에서 무언가를 배울 것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고도 배웠으면 좋겠다.
아픈 건 싫다.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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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의 시간

into the eye 2008. 6. 6. 11:59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라고 했던,

이제 더 이상 실천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아
- 라고 했던,

밑도 끝도 알 수 없던 그 좌절은
사실은 사람들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소위 지/식/인/이/라/는/ 작/자/의
자기 반성 없는 책망이었음을
거리 위에 하나하나 켜진 촛불 위에서 발견한다.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혁명을 이야기하고,
타인을 우습게 알던 자신에게 화살을.

비록 지금 거리 위의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돌아가(야하)겠지만,
거리 위의 촛불은 따스했고, 그 힘은 거대했다.
나는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실천적인 행위의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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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수밖에
힘들게 두 입술을 떼는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그 순간까지의 시간들을 소중히 할 수밖에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올바름이라면
그 고통까지 감내할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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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E BYE

카테고리 없음 2008. 5. 27. 21:18

사건에 거리두기.
예의 '사건'이라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그 해프닝에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기.

이럴 수가, 하는 배신감.
그럴 리가 없어, 하는 부정.
그리고는 거리두기.

마치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인냥,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나'라는 장애물...
그럼 그러자.
나는 이런 게 현실과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그리움, 애틋함, 그 모든 소중함들을
다시 돌려줄께.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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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말했다.
이론하는 사람들, 얘기하는 방식 말이야, 뭔가 쿨한 척 하지만 언제나 같은 말에 같은 방식의 대응만 해, 라고.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너무 쉽게 이건 뭐다, 저건 뭐다 라고 재단해버리지 않고
미묘한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각을 갖고 싶어- 라고 했던 생각.

하지만 결국 나는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느낌.
아, 역시 또 발버둥치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

결국 이론도 창작도 예민한 코끝에서 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뼛 속 깊이 반성했다.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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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 첫 방송되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극찬했던 드라마임에도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봤다.
뭐야, 이건. 드라마인 주제에. 어째서 우주가 되는 건데, 게다가 어째서 디스토피아에서부터 시작해버리는 건데...
'지금을 살아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을 살아라.
어쩌면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말이겠지만,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절실했던 명제.
지금을 산다... 지금을 소중하게...
2008년이 된 지금은 근데 뭐야, 이게. 모두 다 없어져버려.
2002년에 그렇게 열심히 지금을 살려고 했는데,
'지금'을 바꿀 수 없다면 <절규>에서처럼 모두 다 없애버려. 파국에서부터 시작해.
롱 러브레터 표류교실을 보고 나서 가슴 속에 한동안 들었던 먹먹함은 그런 것이었다.
표류교실은 파국에서부터 시작해 희망을 보려 했는데
그렇게 안쓰럽게 살아가려 했는데 지금은 안 되는 거잖아.
다시 파국을 희망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게 가슴 아프고
하지만 그게 현실일지도 모르니까 절망에 빠져서도 안 되고...
"意味分からない。”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는 것도 파국이니까, 가능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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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学

카테고리 없음 2008. 4. 16. 02:09

私、あなたの幸福を祈っている。 

もういいよ。 私が行くよ。 あなた、ここでゆくり自分の人生を付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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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감

카테고리 없음 2008. 4. 9. 02:37
하고 싶은 것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지금 떠나면 두 번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나이가 들어간다는 두려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안 되는데,
발걸음은 자꾸 제자리에 머문다.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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