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eye'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0.12.03 3D, 일상의 분리 1
  2. 2010.10.04 적대와 스펙
  3. 2009.04.04 홍대라는 공간
  4. 2009.01.14 The Cure - Friday, I'm in Love.
  5. 2008.10.15 소외 1
  6. 2008.09.25 보이지 않는 것들의 사랑스러움
  7. 2008.09.18 팬덤문화
  8. 2008.09.11 interview + open cinema
  9. 2008.08.05 아날로그 라디오
  10. 2008.06.06 반성의 시간

3D, 일상의 분리

into the eye 2010. 12. 3. 06:00
사람들은 <아바타>의 성공 이후 3D 미디어(TV와 영화를 막론하고)가 일상적 공간"까지" 이제 잠식한다고 말을 한다. 소니는 제일 먼저 3D 텔레비전 시장을 잠식했고,(이는 제임스 카메론을 비롯한 '예술가'들과 문화자본, 기술자본의 합작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삼성과 엘지는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추세다. 이제 곧 사람들은 종종 거실 쇼파에 기댄 채 검은 안경을 쓰고 3D 영상을 관람하다 곯아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3D가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3D 안경을 쓰고 잠이 드는 것만큼 불편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신은 3D 안경을 쓴 채로, TV를 보다가 요리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가 장을 보고 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것은 우리가 기존의 아날로그 혹은 디지털 TV를 우리의 눈으로 관람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때"는 우리는 일상의 삶을 거스르지 않고서도 TV를 보는 것이 가능했다. TV를 보다가 잠깐 전화를 받고 다시 TV로 돌아오는 non-stop의 행위들 말이다. 하지만 3D 안경은 관람과 그 외의 행위(아마도 '현실세계'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와의 완벽한 단절을 요구한다. 3D 영화가 종종 테마파크에서 상영되었던 것처럼 (이것이 상영되는 극장은 '귀신의 집'과  유사한데, 둘 다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환상"을 체험한 뒤 기진맥진해진 채 다시 현실 세계로 빠져"나온다." ) 그것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break), 우리를 어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래서 3D 미디어는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는 경험이다. 
다시 스윗홈의 거실로 돌아와보자. 일상의 침범은 그 검은 안경을 쓰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검은 안경은 좋은(선명한) 이미지와 나쁜(흐릿한) 이미지를 구분하고 걸러주는 일종의 조리개이다. 여기에서 좋은 이미지는 3D 영상이고, 나쁜 이미지는 그 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다. 그러니 3D 영화가 자랑하는 리얼리티는 어불성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일상의 지각은 3D에 의해 끊임없이 침범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D는 당분간은 지속적인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공간으로 침투해 들어와 일상경험과 매체시각경험을 분리해내고 말 3D. 이것은 스마트폰이 일상으로 침투해들어온 것과 비교할 만하다. 대중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은 이제 대화 중에도 입과 귀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으되, 눈만큼은 스크린에서 떼지 않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만들어내었다. 귀와 입이 열려있다고 해도 머리가 열려 있는 것이 이 대화일지 화면 속 영상일지는 의심스럽다. 대화 상대가 온전히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만약 대화 참여자들 모두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행동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얼핏보면 그래서 스마트폰이 주체의 일상생활화 되어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스마트폰 유저들은 기존의 일상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3D 미디어와 스마트폰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개인을 개인의 일상생활 경험으로부터, 사회적으로 기획된 삶으로부터 개인들을 계속해서 분리시켜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통합의 감각보다 분리의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 대신 미디어 안에서의 내적 통합이 중요해진다. 우리의 두 눈은 분리된 두 개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해내야 하고, 한 스크린 위에 놓여있는 트위터 어플리케이션과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은 결코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필드 위에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감각 경험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혹은 그대로일까? 개인에게 분리와 통합의 감각은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결론을 내리거나 간과해버릴 수 없는 문제다.
여기에서 글을 마치고 싶진 않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좀 더 고민한 후에 후기를 추가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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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스펙

into the eye 2010. 10. 4. 10:06
사회적 적대에 대한 단상 1.
최근에 본 단편영화들, 그 중에서도 특히 20대가 만든 영화들에서 주로 보았던 것. (20대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대부분의 사람이 20대였다는 점) - 이유없는 폭력! 취직이 안 된다고 누군가를 찌르고, 실연을 당해서 누군가를 찌르고, 못난 부모라서 찌르고... 대다수의 경우는 그러한 폭력의 끝은 상상이었다는 것. 어찌하여 20대의 상상은 '불특정 다수'에게 화가 나 있고, 조금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절망의 끝으로 치닫고 있는가?

사회적 적대에 대한 단상2.
사회적 유명 인사에 대한 무한 분노. 혹은 강남권에 대한 야유, '진보'라는 이름으로 - 최소한의 '계급의식'이라는 이름으로 -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공격들.

맑스는 자본주의가 최절정에 달하면, 계급적대 역시 첨예화되고, 이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PT 독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그러하고,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계급적대가 아직 첨예화 되지 않은 탓일까? 혹은 온전히 사라진 것일까? 절망스런 상상력이 20대를 규정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분명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계급적대와 또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우리 사회의 계급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급의 해체와 재구성. Class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계급의식이 부재한 것일까? 단지 계급의식의 고양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가? no!
현재적 의미의 Class의 구성. 그리고 이것이 관객성(대중)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관객성의 조건.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등장. => Spec 쌓기!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적 적대를 생산해내고, 대중문화 담론을 이끌어가는 세대들.
자본재의 소유 유무에서 계급이 결정되고, 맑스적 의미에서 쁘띠 브르주아,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제 3심급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의식하는 비노동주체들(잉여주체), 혹은 비노동성, 잉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는 변방에 존재하고 스스로 '마이너리티' 혹은 '루저'라고 부르는 이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낡은 테제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선 더 이상 '마이너리티 인지'가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대안적 상상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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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라는 공간

into the eye 2009. 4. 4. 01:05
홍대 앞의 지형은 매일 아침 바뀌고 있다.
전날까지 가정집이었던 곳들이 다음 날이면 어느새 공사 중이다.
기존 주거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홍대 앞을 떠나거나
비싼 땅값을 주고 눌러앉느니 가게세라도 받겠다거나 
혹은 큰 맘 먹고 집을 개조해 직접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조용하고 아담했던 집들은 하나 둘 상가로 바뀌어간다.
대부분은 북까페나 갤러리까페 등의 홍대식 까페들이다.
지나치게 화려하진 않게, 많은 경우 집을 조금만 개조해 그대로 카페로 활용하기도 한다.
클럽데이는 여전히 성황이지만, 홍대 앞의 명성은 이제 이 까페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더 이상 에스프레소가 취향이 아니듯
홍대 앞의 까페들도 취향이 아니다.
예전 비하인드가 처음으로 홍대 앞에 들어섰을 때, 예술가들과 사회학, 문화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던
취향의 공동체 같던 까페의 특성은 이제 없다.
만연함이 특별함을 상쇄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홍대는 특정 기호와 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불리운다.
모든 이가 원하는 특별함의 소비.
더 이상 취향은 없고, 기호는 죽었고, 모든 이는 키치와 불량을 선호하는 이상한 시대의 대표라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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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youtube.com/watch?v=TSmfNxmaQHc

(Accoustic Version) http://kr.youtube.com/watch?v=NV19InMqicI

본인들도 지겨운 듯 노래부르는 Accoustic version 과
뭔가 들뜨고 열의로 가득한 위의 뮤직비디오를 비교해보라.
귀엽지 않은가.
마치 거리의 광대들, 영화 <노벰버>를 보는 듯한 유쾌한 뮤직비디오다.

The Cure - 많이 노쇠했지만, 좋은 밴드다.
영국의 악동들 같은 느낌을 주는 멜로디와 로버트 스미스의 목소리.

무엇보다 이 노래의 i don't care~ 같은 심정이 좋다.
꼭 에헤라디야~ 같은 느낌이다.

월요일이 우울하대도 상관없어요. 회색빛 화요일과 수요일도요.
목요일엔 당신에 관해서도 신경쓰지 않겠어요.
금요일엔 사랑에 빠질거거든요.

금요일에 사랑에 빠진다는데 무어라 토를 달겠어요. 

I don't care if monday's blue
Tuesday's grey and wednesday too
Thursday i don't care about you
It's friday i'm in love

Monday you can fall apart
Tuesday wednesday break my heart
Thursday doesn't even start
It's friday i'm in love

Saturday wait
And sunday always comes too late
But friday never hesitate

I don't care if monday's black
Tuesday wednesday heart attack
Thursday never looking back
It's friday i'm in love

Monday you can hold your head
Tuesday wednesday stay in bed
Or thursday watch the walls instead
It's friday i'm in love

Saturday wait
And sunday always comes too late
But friday never hesitate

Dressed up to the eyes
It's a wonderful surprise
To see your shoes and your spirits rise
Throwing out your frown
And just smiling at the sound
And as sleek as a shriek
Spinning round and round
Always take a big bite
It's such a gorgeous sight
To see you eat in the middle of the night
You can never get enough
Enough of this stuff
It's friday
I'm in love

I don't care if monday's blue
Tuesday's grey and wednesday too
Thursday i don't care about you
It's friday i'm in love

Monday you can fall apart
Tuesday wednesday break my heart
Thursday doesn't even start
It's friday i'm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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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into the eye 2008. 10. 15. 02:05
밤 10시 불광역 3호선 출구.
마감을 서두르는 대형마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앞 거리 위로
채소며, 과일이며, 정성스레 다듬어진 재료들을 늘어놓고,
소매상들이 멀뚱하니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
소매상이라 할 것도 없다.
길 위에 보자기 하나 깔아놓고,
뒷마당에 키운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적은 양의 나물 몇 가지들을 펼쳐 놓았을 뿐이다. 얼마나 팔았을까? 채소가 담겨진 바구니는 아마도 처음 이곳에 자리를 깔았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쉼없이 사람들을 토해내던 마트의 문이 닫히고, 
거리의 인적이 드문드문해진다.  
소매상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다.
바구니의 무게는 끝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오늘 하루도 공쳤구나-

부끄러웠다. 나 역시 마트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혼자살이엔 언제나 많은 양을 파는 마트.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 푸석푸석한 채소들.
결국 버리고야 마는 것들을 사들고 가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것보다,
행여 이것이 동정일까, 잊혀진 감상일까 의심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더이상 나가지 못하고, 생각이 거기에서 그만 멈춰버리는 내가 부끄러웠다.
창피해서, 슬퍼서, 화가 나서 돌아오는 길.

이런 게 구조인거야. 구조. 수없이 되뇌었던 말들.
잊혀진 단어들.
그래, 그래서 넌 도대체 뭘 할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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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는 모든 예술 중에서 음악이야 말로 가장 정신적인 것이라고 했고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는 '음악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만큼이나 눈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갖기가 어렵다'라는 표현으로 음악의 경이로움을 표현했었다.

그렇지. 음악은 눈속임을 할 수 없으니까 온전히 느낌이나 취향의 문제가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묘사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반짝이는 재주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달라지는 느낌들이다.
나의 기분에 따라 - 때때로, 영화가 그러하듯이 - 시시각각 달라지는 선율의 느낌.
음표 하나하나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이 감정이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기억은 오로지 신체에 각인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매일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매일 새로운 것을 듣는다.
하나하나 죽어가는 세포들을 일깨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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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문화

into the eye 2008. 9. 18. 04:33

오늘 우연히 한 케이블 연애정보채널에서 팬덤문화 - 특히, 십대들의 팬덤 - 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보내주는 걸 봤다.
이미 본 프로그램이 방송된 적이 있고, 오늘 그 후속편으로 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여전히 팬덤 문화에 대해선 적대적이고,
특히 팬덤문화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거나 팬픽 문화가 성정체성을 왜곡하고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서 "또 이런 방송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프로에서는 이 '위험하고 경박스럽기까지한 십대들의 팬덤'을 자신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는 듯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방송에서 팬들의 인터뷰를 보고 느꼈던 점은 전혀 다른 방향의 긍정태이다.

1. 첫째 팬들은 자신들의 팬덤 문화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
  - 이점이 왜 중요하냐면, 팬덤이 문화정체성 안에서 구성되고, 그 내적구성원들이 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자신들의 발화를 만들어낸다는 점 때문이다.
2. 팬덤문화 안에서 취향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점. 특히 하위문화의 한 지류가 형성된다는 점. => 팬덤문화 내의 언어는 개별 집단이 공유하는 은어적 특성을 지닌다. 이 은어는 주류언어를 상실한, 혹은 그로부터 배제된 집단들의 일종의 저항적 기능어로서 종종 작용한다는 점을 유의할 것.

3. 이런 맥락에서 팬픽의 생산이나 팬문화 내에서의 취향의 공동체, 팬들 사이의 교류가 자생적으로 생겨난다는 점.

4. 팬픽이 왜곡된 성개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성개념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는 점. =>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팬픽이라는 현상을 통해 보여지는 문화적 욕망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점.

그래서 방송관계자가 프로그램이 마련한 토론 이후 팬클럽들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고 좋아했던 것은 말 그대로 자가당착. 그리고 그걸 팬덤 내부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건 팬덤을 더욱 고립화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또한 십대의 팬덤이 대중음악의 중요한 주체가 되었다는 말 역시, 팬덤이 바탕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을 다 잘라내버린다는 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신들이 우려하는 게 '십대 팬덤'이라면 언제부터 십대가 우리 사회의 주류로 존중받았던 적이 있는가? 아, 정말 꼰대같은 훈계들과 언제까지 싸워야 될런지.

 - 아파두라이의 표현을 빌자면 이데오스케이프+미디어스케이브와 에스닉스케이프 사이의 현저한 차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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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몇몇 의욕적인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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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인터뷰의 재미를 맛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만들 때 공간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스토리의 핍진성이 중요하고
어떤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 폼잡지 않는 게 중요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카메라 앞에서 뿜어낼 줄 알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들의 차이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동안 나는 수많은 영화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단 한 번도 귀기우려 듣지 않았다 - 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영화를 다시 보게 되고,
이런 게 인터뷰의 재미라는 거겠지.
이제 조금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법을 배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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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있다 보면 늘 반복되는 패턴에 쉽게 질려버리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조금 다른 '작당'들을 해볼 수 있다는 생각.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가 오고가는 공간으로의 변화가 의욕을 북돋운다.
혹은, 어쩌면 내 취향이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토론을 해 나가는 과정일지도.
영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동안 질리게 싫었던 사람들. 혹은 메마른 애정.
하지만 '취향의 공동체'에서 주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가 드는 건 왜일까?
알 수 없는 자신감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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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살이에 꼭 필요한 친구들
TV, 컴퓨터, 아이팟, 비디오 등등.

요즘 나는 라디오와 친구하는 중이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식이다 보니 주파수 맞추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요리조리 채널을 돌리다 귀찮아서 잘 잡히는 주파수만 듣기 시작했는데
왠걸, 기독교 방송이 어쩜 이리 많은지,
혹시 이것도 mb의 음모가 아닐까 잠시 의심.
결국 꾸역꾸역 채널을 맞춰
좋아하는 채널들을 몇 개 찾아놓는다.

주파수가 잘 맞지 않다보니 쇄~ 하는 잡음들이 계속 나온다.
음악을 들으려면 주의집중!
맘 먹기에 따라 턴테이블 레코드 음반 같기도 하다.

띠리리리리~ 쇄~

그래도 나는 이 낡은 소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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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의 시간

into the eye 2008. 6. 6. 11:59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라고 했던,

이제 더 이상 실천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아
- 라고 했던,

밑도 끝도 알 수 없던 그 좌절은
사실은 사람들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소위 지/식/인/이/라/는/ 작/자/의
자기 반성 없는 책망이었음을
거리 위에 하나하나 켜진 촛불 위에서 발견한다.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혁명을 이야기하고,
타인을 우습게 알던 자신에게 화살을.

비록 지금 거리 위의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돌아가(야하)겠지만,
거리 위의 촛불은 따스했고, 그 힘은 거대했다.
나는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실천적인 행위의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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