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단편집 <내 아들의 연인>에 있는 '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의 소설을 다시 보게 된 건 몇 년 만이다.
오래 전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라는 하루키 소설 같은 그 묘한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었건만,
끈적끈적한 우울과 감상이 서린 변절한 운동권의 자기고백들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성찰이라고도, 후회라고도 할 수 없는 자기애가 아니꼽게 여겨졌던 것도 같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그녀의 소설은 내가 읽은 그 글과 이 글의 작가가
같은 사람이 만나 싶게 많이 달라 보였다.
'아들의 연인'은 유한계급 중년 부인의 자기 성찰적 고백이다.
mood - 정서의 구조 / 이것이 어디 계급차에만 적용되는 문제이겠냐만,
사회학에서 부르디외를 제외하면 이렇다할만큼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차이의 정서적 구조가
이리도 주옥같이 표현될 수 있을까. 그 어떤 논리학이 문학을 제쳐두고 세계를 분석할 수 있을까.
단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제외한다면, 차갑고 건조한 말투로 물화된 세계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그 섬뜩할 정도의 담담함에 기겁하고 만다.
아직 소설집에서 읽은 단편은 단 2편.
<내 아들의 연인>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구조를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면,
내가 읽은 다른 한 편의 소설 <밤이여, 나뉘어라>는 그녀가 한 번 여행한 곳에 대한 인상들로만
상상하여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들만큼
어쩐지 치밀하지 못하고 붕 뜬 느낌이다.
다음 소설들을 마저 읽어볼 생각이다.
어쩌면, 지금 내게 새롭게 의미 있는 작가가 그녀가 되는 건,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예전에 한강이 내게 그랬던 것 처럼.
정미경의 소설을 다시 보게 된 건 몇 년 만이다.
오래 전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라는 하루키 소설 같은 그 묘한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었건만,
끈적끈적한 우울과 감상이 서린 변절한 운동권의 자기고백들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성찰이라고도, 후회라고도 할 수 없는 자기애가 아니꼽게 여겨졌던 것도 같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그녀의 소설은 내가 읽은 그 글과 이 글의 작가가
같은 사람이 만나 싶게 많이 달라 보였다.
'아들의 연인'은 유한계급 중년 부인의 자기 성찰적 고백이다.
mood - 정서의 구조 / 이것이 어디 계급차에만 적용되는 문제이겠냐만,
사회학에서 부르디외를 제외하면 이렇다할만큼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차이의 정서적 구조가
이리도 주옥같이 표현될 수 있을까. 그 어떤 논리학이 문학을 제쳐두고 세계를 분석할 수 있을까.
단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제외한다면, 차갑고 건조한 말투로 물화된 세계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그 섬뜩할 정도의 담담함에 기겁하고 만다.
아직 소설집에서 읽은 단편은 단 2편.
<내 아들의 연인>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구조를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면,
내가 읽은 다른 한 편의 소설 <밤이여, 나뉘어라>는 그녀가 한 번 여행한 곳에 대한 인상들로만
상상하여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들만큼
어쩐지 치밀하지 못하고 붕 뜬 느낌이다.
다음 소설들을 마저 읽어볼 생각이다.
어쩌면, 지금 내게 새롭게 의미 있는 작가가 그녀가 되는 건,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예전에 한강이 내게 그랬던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