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적대에 대한 단상 1.
최근에 본 단편영화들, 그 중에서도 특히 20대가 만든 영화들에서 주로 보았던 것. (20대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대부분의 사람이 20대였다는 점) - 이유없는 폭력! 취직이 안 된다고 누군가를 찌르고, 실연을 당해서 누군가를 찌르고, 못난 부모라서 찌르고... 대다수의 경우는 그러한 폭력의 끝은 상상이었다는 것. 어찌하여 20대의 상상은 '불특정 다수'에게 화가 나 있고, 조금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절망의 끝으로 치닫고 있는가?
사회적 적대에 대한 단상2.
사회적 유명 인사에 대한 무한 분노. 혹은 강남권에 대한 야유, '진보'라는 이름으로 - 최소한의 '계급의식'이라는 이름으로 -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공격들.
맑스는 자본주의가 최절정에 달하면, 계급적대 역시 첨예화되고, 이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PT 독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그러하고,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계급적대가 아직 첨예화 되지 않은 탓일까? 혹은 온전히 사라진 것일까? 절망스런 상상력이 20대를 규정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분명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계급적대와 또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우리 사회의 계급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급의 해체와 재구성. Class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계급의식이 부재한 것일까? 단지 계급의식의 고양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가? no!
현재적 의미의 Class의 구성. 그리고 이것이 관객성(대중)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관객성의 조건.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등장. => Spec 쌓기!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적 적대를 생산해내고, 대중문화 담론을 이끌어가는 세대들.
자본재의 소유 유무에서 계급이 결정되고, 맑스적 의미에서 쁘띠 브르주아,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제 3심급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의식하는 비노동주체들(잉여주체), 혹은 비노동성, 잉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는 변방에 존재하고 스스로 '마이너리티' 혹은 '루저'라고 부르는 이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낡은 테제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선 더 이상 '마이너리티 인지'가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대안적 상상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최근에 본 단편영화들, 그 중에서도 특히 20대가 만든 영화들에서 주로 보았던 것. (20대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대부분의 사람이 20대였다는 점) - 이유없는 폭력! 취직이 안 된다고 누군가를 찌르고, 실연을 당해서 누군가를 찌르고, 못난 부모라서 찌르고... 대다수의 경우는 그러한 폭력의 끝은 상상이었다는 것. 어찌하여 20대의 상상은 '불특정 다수'에게 화가 나 있고, 조금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절망의 끝으로 치닫고 있는가?
사회적 적대에 대한 단상2.
사회적 유명 인사에 대한 무한 분노. 혹은 강남권에 대한 야유, '진보'라는 이름으로 - 최소한의 '계급의식'이라는 이름으로 -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공격들.
맑스는 자본주의가 최절정에 달하면, 계급적대 역시 첨예화되고, 이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PT 독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그러하고,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계급적대가 아직 첨예화 되지 않은 탓일까? 혹은 온전히 사라진 것일까? 절망스런 상상력이 20대를 규정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분명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계급적대와 또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우리 사회의 계급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급의 해체와 재구성. Class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계급의식이 부재한 것일까? 단지 계급의식의 고양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가? no!
현재적 의미의 Class의 구성. 그리고 이것이 관객성(대중)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관객성의 조건.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등장. => Spec 쌓기!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적 적대를 생산해내고, 대중문화 담론을 이끌어가는 세대들.
자본재의 소유 유무에서 계급이 결정되고, 맑스적 의미에서 쁘띠 브르주아,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제 3심급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의식하는 비노동주체들(잉여주체), 혹은 비노동성, 잉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는 변방에 존재하고 스스로 '마이너리티' 혹은 '루저'라고 부르는 이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낡은 테제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선 더 이상 '마이너리티 인지'가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대안적 상상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