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들

카테고리 없음 2009. 5. 31. 01:49
이래저래 정말 시끄러운 날들입니다.
한동안 인터넷을 쓸 수 없었어요.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노트북을 올려논 다음에야 간신히 인터넷 신호를 잡았습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은 고스란히 괄호쳐 내 맘 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이곳을 떠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여기 아닌 어디라도,
변화가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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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카테고리 없음 2009. 5. 21. 15:53
마더 시사회가 끝난 뒤 의견은 분분하였다. 지지와 반대도 나뉘며, 실패하는 모성이냐, 회피되는 기억이냐도 관건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없다.
기억의 코드로 읽기에 영화에서 김혜자는 필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에서 헛점이 많다.
김혜자의 모성의 수행성은 거듭 실패하고, 결국 미쳐 날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상한 방식의 파국) 즉, 김혜자를 제외한 모든 세계는 '상식'으로 돌아가지만 김혜자는 그 상식을 뒤엎고자 아둥바둥한다. 그녀는 형사보다 더 집요하게 사건의 내부, 혹은 이 마을 안의 상식 체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는 혼자 모든 것을 조사하려 하고, 파고들고, 혼자서만 비밀을 들으려 하고, 언제나 '혼자인 채로' 남아 있게 되고, 결국 그녀가 들어가려고 했던 내부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그녀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매개체는 아들 '도준'이다. 도준은 어리숙하고 덜떨어지지만, 도준이라는 존재는 예의 그 필드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자연스럽게 거기에 동화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도준을 부여잡고 있는 도준 엄마는 도준이 그 엄마를 거부하는 순간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 안에서는 빈 시점이 많고, 도준 엄마는 훔쳐보는 시선을 갖거나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신의 세계에서의 숭고를 믿는다. 이유없이. 남들이 이해할 수 없어도 도준 엄마는 도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모성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모성은 집요한 광기와 집착의 혐의를 가지게 되며, 결국은 그 광기로 폭주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며, 대안적이거나 긍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영화 자체가 그리고 있는 것이 모성이 아닌 뒤틀린 모성이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모성을 뒤엎고 재해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뒤틀린 모성의 공포를 다시 한 번 불러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이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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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이야 원래도 좋아했었고, 요즘 들어 재미있게 읽고 있는 사람은 버틀러, 스피박, 그리고 랑시에르다.
(그러다보니 칸트도 한 번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버틀러랑 스피박은 어렵지만 논의는 따라가겠는데, 랑시에르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다가도 다시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미학의 정치성을 논의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기존의 미학에서의 실천주의와는 또 다르다. 재현의 윤리성이나, 재현이 구현된 사회적 맥락을 따지지 않고, (이런 점에서 부르디외가 탁월하게 밝힌 계급 사회와 취향의 공동체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오히려 감각을 소유하는 시선의 전복을 중요하게 파고든다. 참으로 탁월한 관점의 변화지만 여전히 섣불리 따라가기에는 모호함이 남는다.

더 읽어보고 싶은 사람이다. 암튼, 얼마 전 기사 중에 이런 글이 있는 걸 봤다. 음... 역시 이런 게 트랜디가 된다는 것도 좀 놀랍지만, 여성학자들의 중요성은 확~ 사라지는 걸 보니 아쉽다. 지금의 사회학에 아감벤이나 랑시에르보다는 버틀러가 미친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긴 한데. 모를 일이다.


지식 인의 지식인은 누구일까 (출처: 주간 한국, 이윤주 기자 )

들뢰즈, 벤야민, 라깡. 한때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식인이다. 해외 유명 저널에서 발표, 인용되는 지식인은 국내 지식인 사회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일반 독자들이 신문과 전문잡지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혜안을 얻듯, 지식인 역시 국내외 석학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을 분석하게 된다.

국내 지식인들의 저서, 비평, 칼럼, 강연, 토론 등을 통해 소개, 인용되는 이른바 ‘지식인의 지식인‘은 우리 지식사회와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최근 정보를 얻는 매체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되는 해외 석학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소개된 사상이 인용되는 기간은 더 짧아 졌다. 국내 지식인 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굴까?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 한국 지식인 사회 이슈가 된 지식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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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book review 2009. 4. 11. 02:26
작년 한해 가장 hot 한 문학비평집 중에 하나였다는 <몰락의 에티카>를 읽고 있다.
사실 hot 해서는 아니고, 조영일씨가 신형철 씨의 평론집을 보고 가라타니 고진을 오독했다는 식의(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반박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서두까지 읽은 느낌은 대략 이렇다.

1. 두서 없이 이론들, 더 정확히는 개념어를 끌어오는 방식은 다소 안이하다. 개념어를 가져와 문학적인 표현으로 문장 안에 가져다 쓰는 방식(개념어 뒤에는 이 개념들을 사용한 이론가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과시적이기까지 하다. 지적 허영으로도 보이고, 그것이 그가 말하는 진실일까 의문이 든다. 이미 기존의 의미들은 문장 안에서 탈각되어 버렸다.

2. 이런 글쓰기 방식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의문이 든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거대담론에 대한 집착을 역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념어의 나열들 속에서, 그가 원하는 '문학적인 것을 찾아내는' 비평이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그가 비평의 기능이 아니라고 했던 책 읽어주는 비평가의 기능을 그 스스로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3. 개인적 관심사로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고진에 대한 부분이다. 오래전 꼼꼼하게 읽지 않은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이긴 하지만, 고진의 논지를 총체성에 대한 종언이라고 쉽게 말해버릴 수 있을까? 언제 고진이 총체성에 대한 집착을 내보인 적이 있었나? - 확인해야 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고진씨와 당신이 아는 고진씨가 다른 것 같은데...

마지막에 선이 아니라 진실이 윤리라고 이야기하고, 주체의 총체성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체성이 문학이라고 이야기했다. 진실이 아니라 진심이 더 윤리적이거덩~ 그리고 무의식의 총체화가 가당키나 한 거야? 문학이 그렇게 대단해? -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물론 몇 장만 읽고 하는 얘기다. 기억을 위해서. 끄적끄적. 좀 더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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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라는 공간

into the eye 2009. 4. 4. 01:05
홍대 앞의 지형은 매일 아침 바뀌고 있다.
전날까지 가정집이었던 곳들이 다음 날이면 어느새 공사 중이다.
기존 주거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홍대 앞을 떠나거나
비싼 땅값을 주고 눌러앉느니 가게세라도 받겠다거나 
혹은 큰 맘 먹고 집을 개조해 직접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조용하고 아담했던 집들은 하나 둘 상가로 바뀌어간다.
대부분은 북까페나 갤러리까페 등의 홍대식 까페들이다.
지나치게 화려하진 않게, 많은 경우 집을 조금만 개조해 그대로 카페로 활용하기도 한다.
클럽데이는 여전히 성황이지만, 홍대 앞의 명성은 이제 이 까페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더 이상 에스프레소가 취향이 아니듯
홍대 앞의 까페들도 취향이 아니다.
예전 비하인드가 처음으로 홍대 앞에 들어섰을 때, 예술가들과 사회학, 문화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던
취향의 공동체 같던 까페의 특성은 이제 없다.
만연함이 특별함을 상쇄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홍대는 특정 기호와 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불리운다.
모든 이가 원하는 특별함의 소비.
더 이상 취향은 없고, 기호는 죽었고, 모든 이는 키치와 불량을 선호하는 이상한 시대의 대표라면 또 모를까.
Posted by peach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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