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의 배신에 질려서 국가에 스스로 감금당해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복수와 배신은 거듭되고, 더 이상 의리와 신뢰도 없고, 명분도 없으며
그래서 명분보다 길게 사는 것을 선택해도, 어느 장소도 안전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완전히 봉쇄된 출구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섬뜩했던 영화.
'film review'에 해당되는 글 18건
- 2011.04.22 아웃레이지(2010), 기타노 다케시 152
- 2011.02.06 신주쿠 사건(이동승, 2008) 8
- 2011.02.06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11
- 2011.02.06 흑사회 Election 2005 11
- 2011.02.04 <참새>, <복수> 3
- 2011.01.16 골든 슬럼버
- 2010.11.04 Carmen returns home (1951)
- 2010.03.26 인빅터스:우리가 꿈꾸는 기적
- 2010.01.04 전우치
- 2010.01.04 셉템버이슈
이동승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다. 성룡의 액션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이 영화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처음엔 주인공(성룡)이 너무 착해서 다소 느슨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그가 참...
하지만 중반에 법적 신분(외국인 허가증?)을 획득하기 위해 법을 위반하는 장면부터는 조금 속도가 붙었고, 그의 동생의 복수를 위해 달리는 장면, 신주쿠의 다른 조직세력으로부터 공격 당하는 장면 등은 장르적으로 탁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은 끝까지 착한 캐릭터를 버리지 않았고, 다케나카 나오토는 무슨 키다리 아저씨 마냥 성룡의 주위를 맴돌면서 성룡을 지켜주려 하고 있고, 죽어가던 성룡의 대사가 다케나카 나오토에게 들리지 않음으로써 절정의 신파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게 이 장면은 몹시 처연하다. )
신주쿠는 다른 액션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홍콩의 침사추이처럼) 일본 야쿠자 조직에겐 몹시 중요한 공간이다. 여기에 이민족이 들어가서 이 공간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공간의 성격이 완전히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 자체가 내셔널 vs 내셔널의 대당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다. <정무문>에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을 깨부수고 들어가던 이소룡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성룡은...
하지만, 이 방관자가 누구이냐가 이 영화에서는 몹시 문제적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복남의 어린시절 서울 친구로 등장하는 이 방관자는 도시에 사는 싱글녀이다. 그녀는 제법 사는 것 같고,(그녀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이나, 죽은 외할아버지의 집을 처분하지 않고 사는 것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는 폭행 사건을 목격했지만, 휘말리고 싶지 않아 성의없는 증언을 한다. 이는 후반부에서 복남의 딸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다시 한 번 부인하는 데서 반복된다. 그래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복남은 결국 살인의 화신이 되고 만다.
이 영화의 장르적 짜임새의 불충실함(특히, 후반부의)은 논외로 차치하고서, 이 영화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적으로 좀 더 정교하게 논의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비판받아야 한다.
우선 영화의 이야기는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가정 폭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영화는 사람이 몇 살지 않는 섬마을에, 섬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는 복남을 위치시킨다. 아마, 그녀의 부모나 다른 가족 관계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복남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한 장치였으리라. 그래서 복남의 플롯만 전개된다면, 6,70년대에 자주 등장했던 여귀물의 고어버전 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하나의 플롯을 덧댐으로써, 방관하고 있었던 '그녀'를 비판한다. (이것은 이미 <오로라 공주>에서 시도되었었던 것이므로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복남에겐 도움을 청할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고, 복남은 '그녀'에게 죽어라 구원의 편지와 전화를 건넸지만, '그녀'는 복남을 귀찮아했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건 그녀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은행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할머니의 대출을 거부한다. 다른 회사 동료가 해결한 걸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였겠지만, 그녀는 귀찮음에 해결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원리 원칙을 잘 따르기 때문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음에 분명하다.) 할머니와의 말다툼에서 그녀는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히스테리적 반응 때문에 동료의 뺨을 때린 후 회사를 잠시 떠나 섬에 들어가게 된다. 즉, 그녀의 성격이 히스테리적이라는 정보가 하나 관객에게 추가된다. 그런 그녀가 복남의 진짜 가해자들보다 더 문제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그래서 관찰자이고 관객인 그녀. 그녀만이 죄의식에 사로잡힌다고 햇을 때, 그래서 그녀의 위치에 놓여진 관객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을 때, 무엇이 정말 문제적인가? 진짜 가해자들은 죽음으로써 사건에서 자유로워졌다. (복수의 완성형. 그들은 처벌받았고 그래서 더 이상 위협의 대상도 원망의 대상도 아니다.)
유일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 여성.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극히 도시적이며, 지극히 현대적인 이 여성과 지극히 촌스럽고, 지극히 자애로우며, 지극히 전근대적인 이 여성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후자 쪽이다. 가부장제에서 고통받았지만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모성을 다한 복남은 살인마로 변하지만, 서사 구조상에서 용서받는다면, 그 친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물론 관객은 그녀의 위치에 놓여지기 때문에 살아남았음에 안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복수를 다루었던 6,70년대 호러물이나 살인(혹은 유기)에서 불특정 다수의 방관자의 위치를 사회구조적으로 문제제기했던 <오로라 공주>와는 달리 이기적이고 잘 나가는 현대 도시의 싱글녀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증으로 읽힌다.
힘든 사람이 있어도 도와주지 않는 그녀. 폭행사건을 보아도 침묵하는 그녀. 복남의 시고모의 말처럼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시골와서 쉬겠다고 내려와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코 젠더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가 될 수 없다.
<참새>는 두기봉의 최근 액션 영화 중에 마카오 (혹은 상하이) 가 등장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영화인 대신, 홍콩의 거리 구석구석 낡은 공간들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반면 <복수>는 마카오와 홍콩을 오가는데, 마카오에서 눈에 띄는 몇몇 공간들은 실외 세트로 이루어져 있는 듯 하고, 홍콩으로 넘어왔을 때의 공간 묘사는 그리 상세하지 않다.
암튼 두 영화를 한 번에 본 관계로 계속 비교하게 되는데, 이제 비교는 생략하고 각자 영화로 들어가보면.
<참새>는 예의 산책자의 시선으로 풍경을 누비고, 또 복잡한 거리에서 길을 잃고 하는 식으로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 과히 오우삼의 <와호장룡>의 대나무숲 액션을 보는 듯한 우아함과 정교함에 더해 절제미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들어가는 거리의 소매치기 쇼부는 너무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니 생략. (하지만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그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모 평론가의 글에는 실망.)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렵지만, 장르적 실험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엔 미약. 풍경을 제시하는 영화라는데는 동의할 수 있음.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통틀어 얘기하기는 어려움.
<복수>는 과잉된 스타일을 생각하자면 좀 힘든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완전 좋음. "정작 당사자는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우린 해야 해." 라던 부분. 그리고 자신의 잃은 기억을 대신 기억하여 죽은 자들을 위해 거의 영적으로 기억을 되찾은 후(그들이 얘기를 해줄 수 없으니, 남자는 영적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 완전 빵 터졌지만 완전 대단했던 장면.) 그 갚음을 하던 부분은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에 가서 자신의 기억을 벽 속에 말하고 묻어버린 것에 대한 화답처럼 들려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장면. 누군가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도와 연대의 모티브라는 점에서 너무 좋았다.
In addition, the main French character were losing his memory about his vengeance, while smiling in the last scene of the film. The man who wanted to protect their promise with him disappeared and the man's memory was also disappearing. Even though his memory and friends did not exist any more in the real (and they knew that.), their actions were not meaningless. In Johnnie To's films, frustration happened repeatedly. However, these frustration does not mean any gap(positively) or permanent ending(negatively) to me. Rather I believe that this means an electron escaped illegally out a closed circuit. This electron does not show up its power but the frequency of this escape makes the closed circuit changed temporally because the elctron makes another electronic field momently.
이야기의 완결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구조를 짜는데는 결함이 있는 영화.
(아마도 이것보다 훨씬 더 긴 러닝타임을 필요로 했겠지만, 개봉을 위해 쳐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듯 하다. 감독판이 나온다면 이야기의 빠진 부분들이 분명 더 들어가겠지.)
영화는 법치권력, 미디어권력,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피해자가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남자는 평범한 남자였지만,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일약 유명인사가 되지만 결국 그가 믿었던 미디어에 다시 배신을 당하게 되면서, 영원히 도망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
그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은 그에게 "도망가다 죽는 것은 도망가는게 아니야. 살아라. 도망가." 등의 말을 남긴다. 영화의 결말은 다른 영화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데, 그는 시스템에서 구원되기보다 시스템 밖으로 완전히 도망가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의문 하나. 이는 본 아이덴터티의 결말과도 비교해보아야할 것이다. )
맞서 싸우기엔 우린 힘이 너무 약하니, 시스템의 망에 걸려 들지 않도록 최대한 피하고 도망치고,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감독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있느냐. (의문 둘)
또한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가 자신이 구해 준 아이돌 스타와 잤는지를 물어본다. 이것은 미디어의 선정성을 담지하는 일반 시민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너무 자주 반복된다. (의문셋.)
사건을 푸는 키워드. 비틀스의 골든슬럼버. 황금빛 선잠이란 뜻으로, 가사 중에 "There is one way to go back home" 뭐, 대충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것만으로 이 노래가 이 사건의 핵심 키워드라고 하기는 어렵지. 다만, 이것은 굉장히 수사적인 것인데, 이 선잠이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넙죽 엎드려 있으렴. 으로 바뀔 수는 있겠지.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정서는 상당히 반동적일 수도 혹은 수세적일 수도 있을 터.
정리하면 골든 슬럼버는 "지금은 시스템을 이길 수 없어. 도망가. 도망가지 않으면 걸려들 수밖에 없어. 일단 살아 남아 있어. 그러면 너를 아는 누군가는 너를 승인해줄 거야... " 정도일까?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는 데는 동의. 하지만, 일단 살아남아 있는게 최선일까?는 부정적. 나를 아는 누군가의 승인 - 따윈 필요없어.
수업 시간에 클립만 보고 나의 관심 주제인 전후 returning home과 nation building의 관계에 관한 영화인줄 알았으나 영화는 훨씬 더 경쾌하게 nation building의 문제를 가로지른다.
영화에서 카르멘은 도쿄에서 성공한 댄서로 어린 시절 집을 나간 후 몇 년만에 집으로 귀환한다. 그녀는 여러모로 영화 속 장님 오르간 연주자와 대비된다. 그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장님이 되었고 오르간을 연주하는 예술가이다. 영화 속 카르멘이 '저속한' 예술가로 묘사되고 개인적 영리를 위해 도망갔던 것과는 무척 대비적이다. 그러나 자칫 국가적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는 장님이 주축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카르멘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그녀의 공연이 성공리에 마을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승인을 득함으로써 카르멘은 개화되지 않고 그대로의 카르멘으로 남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교장으로 대표되는 국가는 불경스런 대중문화를 자신들의 자장 안으로 용인하고, 이 불경스런 예술에 동화된 못된 초기 자본가도 개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이 새로운 문화의 탄생마저도 포섭한다.
리터닝 자체가 현재를 바꾸는 것이다.
보통의 전후 영화들에서 리터닝한 사람들은 과거를 부인하고 과거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을 하는 반면, 이 영화에서 리터닝은 현재가 과거와 조화를 이루면서 유지된다. 오히려 과거는 언급되지 않고,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을 현재가 당차게 이끌고 나간다.
아시아에서 최초의 근대적 경험이라 할 만한 전쟁,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각 국가들이 어떻게 nation을 형성했는지 보는 것은 참 재미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영화가 최절정에 도달했을 때조차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통합',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미국적 가치.
나는 그의 영화에 이 메세지가 덜할 수록 그의 영화를 좋아했다.
물론 그의 영화에 이 메세지가 강하게 드러나는 순간조차 그의 진심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숱하긴 하지만.
<인빅터스>는 그 중 어느 쪽이냐 하면 이 메세지가 너무 강해서 프로파간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쉽사리 이 영화에 동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가 싫다라는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넬슨 만델라에 관한 영화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넬슨 만델라가 아니라 멧 데이먼이 연기한 한 럭비 선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즉, 버락 오바마 시대에 국민들에게 바라는 것. 지도자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도자의 시기에 국민들은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문제.
그래서 영화 속에서 넬슨 만델라는 한없이 고정되어 있고,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가족에 대한 금기사항), 그를 만난 어느 누구도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시대는 바뀌었고 바뀌어야 하는 건 국민들이다. 내러티브의 축을 이끌고 가는 건 넬슨 만델라지만 - 그에게 너무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 있는 초반부는 그래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 여기에서 역동적으로 다른 축을 그려내는 건 럭비선수 (개인)의 문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그를 바라보는 넬슨 만델라의 시선과 그 시선을 받아들이며 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멧 데이먼을 보여주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영화의 직접적인 메세지가 싫을 수도 있다.(그랬다면 그의 이전 영화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미국적인 장르라 불리우던 서부영화의 히어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였고, 그의 최근 영화의 주제엔 크든 작든 미국적 가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즉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인물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이 영화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질문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는 미국의 역사를 살았다. 그리고 새 시대의 상징처럼 새로운 지도자를 만났다. 그는 질문한다. 시대는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액션이 주는 쾌감은 뛰어났고 영화적 요소로만 보자면 새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싶다
몇몇 영화들이 시도한 바 있지만 실패했거나 너무 앞서 있다 했던 것들.
더 이상 극적인 배우들의 연기와 제도화된 쇼트들을 볼 수 없다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동이 중요하지만 정작 지정학적 공간은 무국적의 공간이 된다
새롭진 않지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가버린 영화의 시대의 영화.
세상을 호령하려면 이 정도쯤 막 가봐야지.
셀리브리티, 촉망받는 디자이너들, 뛰어난 감각을 지닌 패션에디터들의 집착
심층 취재 형식이라기보다 그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영화.
보그 에디터들의 뛰어난 카리스마와
그들 안에서의 갈등이 재미있다.
얼마 전 방영된 <스타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음. 패션 드라마라면 훨씬 더 볼 거리를 많이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실제 패션 에디터들의 삶을 보고 나니 <스타일>은 뭐랄까, 좀 장난 같달까...
물론 이 영화도 분명 겉핥기 같긴 하지만 그들 각자의 포스가 워낙에 뛰어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