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review'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0.01.02 아바타 1
  2. 2009.11.03 파주
  3. 2009.09.01 이태원 살인사건
  4. 2009.01.29 유성의 인연 流星の絆
  5. 2009.01.12 쌍화점
  6. 2008.09.23 모던보이...
  7. 2008.06.14 청춘영화와 여성관객성 1
  8. 2008.03.0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

아바타

film review 2010. 1. 2. 20:06

3D 입체 영화라는 신비한 체험.
스크린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세계.
놀라워.
하지만 처음의 신기함은 이내 적응되고
여전히 너무 크게 느껴지는 안경과 시야 밖 제대로 맞지 않는 초점 때문에 꽤나 애를 먹음.
역시 사람의 감각이란, 모든 것에 너무 쉽게 적응된다.
그래서 새로움이란 늘 식상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3시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3시간짜리 롤러 코스터를 탄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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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film review 2009. 11. 3. 00:14
서우의 큰 눈동자가 보여주는 여운이 너무 강하게 남는다.
이선균의 주변에 머무르는(혹은 머물렀던) 세 여자.
한 명은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첫 사랑.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알고 있었던 듯 하지만 다른 남자를 선택했고
남자를 놓아주지도 않는다. 첫사랑은 남자에게 잊지 못할 부채감을 가져다 준다.
또 다른 한 여자는 남자를 한없이 사랑해줄 것 같은 여자.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여자. 팜므파탈.
이 팜므파탈 같은 여자가 서우다. 하지만 전형적인 팜므파탈은 아니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그녀는 남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 감정을 드러내는 건 대사도 아니고 제스처도 아니고 온전히 서우의 커다란 눈이다.
쉴 새 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눈빛. 이 눈빛이 영화의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이 배우를 보고 있으면 마치 '밀레니엄 맘보'의 서기를 보는 것 같다.

악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그녀의 존재. 이유없는 죄의식으로 사랑도, 철거 운동도 하고 있는 남자. 그 무게가 너무 깊어 아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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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이태원 '버거킹' 살인사건을 영화화한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
이미 이태원의 그 버거팅은 없어져 실제 그대로의 재현은 어려웠을 것이고, 촬영에 선뜻 응해주는 동일 브랜드의 매장을 찾기는 어려웠겠지만, 간단하게 세트를 지어 예전의 그곳을 모방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이 영화에는 최근의 한국영화가 마치 그것이 영화의 완성도의 측도라도 되는 냥 내세우는 '공간의 완벽한 재현'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야 없다.
조금만 발품과 손품을 팔면 쉽게 구할 수 있었을 사건 수사 일지도 허술하고 - 물론 홍기선 감독은 그런 재현에는 원래도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긴 하다 - 당연히 자극적 소재로 선택당할 줄 알았던 '반미' 감정도 별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 사건이 TV에서 재현될 때 강하게 들이밀었던 '미국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약소민족의 설움' 같은 것은 이상하리만치 없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머니의 품안을 외쳐대던 '선택'의 홍기선 감독이 이번에는 피해자의 어머니를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머니가 주인공의 나르시시적 고향이 되지 않는 훨씬 더 담백한 영화를 만들었다.
왜 '버거킹'이라는 공간을 버렸을까? 이태원이라는 혼종성의 공간은 왜 홍대로 바꼈을까? 미군이었던 용의자들은 왜 혼혈과 어느 재벌 아버지를 둔 재미교포 2~3세 쯤으로 바뀌었을까? 영화는 사건의 본질을 계급문제와 인종주의로 환원시킨다. (물론 이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인데 한국인과 맥시코인의 혼혈인 미국계의 남자와 한국계의 남자 사이의 우열에서 한국계 남자가 더욱 우위라고 영화는 말한다.)
여기에 영웅 '검사'가 있다. 정재영이 분하는 이 영웅은 홀로 외로이 정의를 찾아 싸우지만 무엇이 정의인지 알지 못해 반신반의한다.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권력'에 의해 쉽게 무의로 돌아선다. 홍기선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영웅'인 주인공은 늘 고립되지만, 늘 홀로 독야청청 싸운다. 그러나 쉽게 승리하지 못한다. 영웅이지만 슈퍼맨이 될 수 없는 영웅들. 히키코모리의 영웅들. 그 영웅은 이번에는 미군이 아닌 '정의를 알 수 없는 시대'와 맞서 싸우고 이것을 비호하는 것은 유산계급과 권력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또다시 유예된다. 망망대해에 언제나 영웅은 홀로 싸우고 있다. 그것이 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이 지나간 후든, 포스트모던의 사회가 개인을 고립시키던 때든, 혹은 90년대 혼종성의 공간이 2000년대 자본과 정체성의 광포한 폭탄이 쏟아지고 있는 홍대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위치지운 그 지점은 지지를 보내주고 싶다. 비록 여전히 '영웅적 개인'은 지나치게 고지식한 면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 고립의 무게감이 다음에는 지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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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도 칸쿠로의 지난 분기 드라마라 보기 시작.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기 시작.
만류의 이유도 알겠고, 결말의 어정쩡함은 나 역시 불만이지만
간만에 쿠도칸 드라마 중에서는 좋았다.
물론 IWGP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 그것의 뒤집어진 버전이라는 친구의 이야기는 일단 논외로 해야겠다. 
하지만 내 경우에 세대론적 문제를 얘기해버리면 두 손 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여전히 전세대는 뒷세대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건가.
죽은 부모는 살아남은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죽은 부모를 대신할 아비라 여겼던 자는 살아남은 아이들의 희망을 뺏고,
결국 다시 어른따윈 믿고 싶지 않아라고 얘기하는 아이들.
(뭐 그러고서 다시 법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뭐냐 싶지만--;;;)
여기까진 뭐 그럭저럭 동의할 수 있는 선의 이야기고,
그닥 새롭지 않은 이야기지만 빼놓을 수 없는 건 각자가 연출하는 사기극 혹은 외삽극이다. 만화로 치면 각 권의 본편이 끝난 후 작가가 번외로 그려넣는 삽화 같은 거다.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었으니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작가의 모든 상상력과 하고 싶은 속얘기가 드러나는 곳일 것이다. (원작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 "호숫가 살인사건", "용의자 X의 헌신" 등을 쓴 사람이다. 소설로는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고, 드라마나 영화로만 보았었는데, 넌덜머리 나는 우울함을 가진 사람임엔 분명한 듯 싶다.)
추정컨대, 원작이 굉장한 비관으로 일관하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는 식으로 갔다면
이 드라마는 이 사기극(외삽극) 때문에 비관 일색으로 가지 않는다.
"유족도 웃을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니노미야의 이 말은 아마도 이 소설을 드라마화 시키고 싶은 작가의 애초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14년동안 복수를 다짐하는데, 어릴 때 살해당한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기간 내내 복수를 다짐할 수 있으며 쭈욱 우울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쩌면 잊혀져가는 부모, 그래도 짐스러워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처를 가까스로 해결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이 드라마는 세대론의 찌꺼기, 잔여물을 소진시켜버리는 느낌이 강하다.
그게 완전연소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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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film review 2009. 1. 12. 12:30
유하 감독의 주제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의 말마따나,
"소년에서 성인 남성으로의 성장"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여기에는 성장하고 싶지 않은 소년, 순수의 표상으로서 소년과
어쩔 수 없이 성장해버린 남성, 퇴락한 남성이라는 대립이 존재한다.
성장하고 싶지 않지만 기어이 소년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돈과 여자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그리고 <쌍화점>에서
소년들의 우정을 깨버리는 건 여자들이다.
유하 감독의 영화에서 남자들의 행복한 관계를 깨버리는 위험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녀들은 팜므파탈이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쟁취하지 못하고, 서사에서 아웃당함으로써 처벌받는다.)
그의 영화에서 남자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계 역시 언제나 깨질 위험이 있다라는 점에서 판타지다.
그래서, 성인 남성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 판타지의 세계 자체이다.
이 공간은 실제로 존재했던 공간이 아니라 유비적으로 거슬러올라갔을 때 존재했어야 하는 공간,
이상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판타지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 공간이 판타지의 세계가 됨으로써, 현재의 상실감을 보상해줄 수 있는 심리적 기재로써
이 영화의 공간이 그의 영화에서 재등장하는 것이다.

<쌍화점>이 동성애적 코드를 강하게 담고 있다고 하지만, 이건 마케팅적 측면이 크다.
그의 영화는 동성애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동성사회를 모티브로 한다.
사실 그의 영화의 내러티브 공간은 거의 대부분 언제나 이 동성사회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그의 영화의 지속적인 주제였었고, 이번엔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다.

소년들은 '상실'과 '성장'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들은 '성장'하고, 그것을 깨달은 뒤 '상실'한 무언가를 가정하고,
실제로 있었다고 믿어버리고, 그것을 찾아나선다.

그것이 소년들의 모험담이 되고,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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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film review 2008. 9. 23. 12:04

'해피엔드'와 '사랑니'에서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분명 있었다. 그랬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 영화 '모던보이'에서는 정지우 감독이 가장 붙들고 싶었던게 무엇이었을까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모르겠다. 해피엔드에서 인물의 내면을 파고들던 깊이, 사랑니에서 서른의 인영이 꿈꾸던 섬세한 감정의 깊이는 이 영화에서 표면의 디테일에 맴돌뿐 안으로 파고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몇몇 감독들이 그런 전철을 밟았던 것처럼 스펙타클에 대한 과시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정지우 감독은 예쁜 화면을 뽑아내기 위해 장식적인 화면으로 덕지덕지 채워넣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분명 이 영화가 그런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시적이거나 과욕적인 화면은 아니다. )
어쩌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데 실패해버린 것일까? 동시대적 감수성을 절대 놓지 않았던 정지우 감독이 모던보이를 선택했을 땐 시대의 암울함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과거엔 분명 존재했겠지만, 지금 세대에게 일제 시대가 암울한 트라우마일리 없다. '거짓 트라우마, 혹은 상실하지 않았음에도 상실했다고 믿는 '가짜 향수'가 왜 하필 이 영화에 다시 등장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 속 수많은 디테일들이 의미하는 건 뭘까? 단지 표면일 뿐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모던보이와 함께 떠올랐다. 며칠간의 난감한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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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영화는 흔히 하위 장르, 혹은 장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며 장르론자에게 홀대받는다. ‘청춘’이라는 것이 소재적인 차용일 뿐, 내용상으로나 형식상의 공통분모를 도출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라고 하는 것을 단일하게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쩌면 장르에 매여 장르를 분류하는데 공을 들이는 건 무의미한 메아리가 아닐까? 어떤 장르라도 ‘장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속성을 동등하게 공유할 수 없으며, 단 한 가지 장르적 속성만을 가지고 있는 영화도 최근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장르는 이상한 방식으로 곁가지를 친다. 코믹 멜로, 액션 느와르 등의 복합 장르를 표방하는 영화들. 혹은 장르를 비트는 장르 영화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단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장르 무용론을 펼쳐야 할까? 그랬으면 싶지만, 애석하게도 장르는 여전히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저 화려한 영화 홍보 문구들을 보라! 사실이 이러하다면, 이것이 정말 장르 영화냐 아니냐, 혹은 어떤 장르냐를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기보다 장르에 대한 기대 심리, 즉 장르영화의 관객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

 

다시 청춘영화로 돌아와보자. 청춘영화는 전통적으로 십대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진 장르이다. 당연히 그 소구층은 십대(젠더적이기보다 세대적인 층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스폰지를 비롯한 예술영화관들에서 청춘영화(특히 일본의 청춘영화들)는 여성관객들에게 환대를 받는 작품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스폰지는 극장 이전을 준비하며 자신들의 주 관객층인 2,30대 여성 관객들이 이탈해나가지 않도록 친히 ‘청춘영화제’를 마련하였다. 청춘영화의 무엇이 2,30대 여성관객들과 소통하는가?

물론 여성관객들이 이런 예술영화관의 주관객층이 되는 것은 비단 청춘영화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의 주소비층을 이루는 2,30대 여성들(특히 싱글일 경우)은 어디를 가든 환대를 받는다. (여성관객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꽤 강한 설득력을 얻으며, 통계자료에 인용되고 한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일견 그들의 행위를 너무 경제적인 측면 안에서만 제약하는 논의는 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혹은 왜곡되어 있다.) 그녀들은 패션, 먹을 거리, 마실 거리, 놀 거리, 즐길 거리 들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다. 20대 초반이 주로 주인공이었던 TV 드라마에서는 2, 30대 싱글 여성들(<내 이름은 김삼순>, <여우야 뭐하니>,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의 노골적인 연애사, 직장에서의 고민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공연, 영화 할 것 없이 2,30대 싱글 여성들의 이야기(영화와 뮤지컬로 각각 만들어진 <싱글즈>가 대표적이다)가 만들어진다.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한 세미나에서 자신들의 극장 관객들의 80% 가까이가 여성이고, 그들 중 태반이 나홀로 극장을 찾는 이들이라고 하며 이들을 어떻게 안정적인 관객층으로 끌고 나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단순한 소비주체로서, 좀 더 특별한 문화적 취향들을 선호하는 것일 뿐(된장녀라고 부르며 비하하는 태도와 유사하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녀들의 행위의 긍정적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들이 단지 넉넉한 시간과 적지 않은 월급을 가지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문화활동이라고 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큰 흐름에 떠맡겨져서 극장을 찾는 것일까? 그렇다면, 청춘영화의 주 관객층이 2,30대 여성이 되고 있다는 게 의미하는 건 뭘까? 능동적인 소비주체로서 2,30대 여성의 현재 위치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도 말이다.

 

이천년대 후반, 남한 여성들의 삶.

신자유주의와 함께 고용불안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성별과 세대를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지만 특히, 전통적으로 비정규직이었거나, 혹은 일용직 노동 종사직이 많았던 여성들에게는 더욱 심각한 것이 된다. 여성의 전체적인 취업률은 과거(정말 과거의 일이다.)보다 많이 늘었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비정규직으로 다시 유입된다. 끝없는 고용시장의 불안.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 판타지는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기가 힘들다. (그것은 과거의 결혼 판타지의 실패와는 또 다른 문제다. 젠더를 막론하고 누구나 겪고 있는 삶의 총체적 불안정) 여기에 겹겹의 위기와 위험들이 여성들에게 겹쳐진다. 젠더 시스템 하에서 여성의 몰락은 남성의 그것보다 가혹하며 위험하다. 혹은 성공한 여성들에게조차 곳곳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경제적 추락의 위험과 신체적 몰락의 위험. 그리고 이런 위기의식은 불안한 듯 노출된 청춘들에게 시선을 옮기게 한다.

물론 이런 공모성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그 개연성의 여부를 수치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미래가 불투명한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불투명한 여성들이 비슷한 연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혹은 신체적 위협을 체감하고 있는 여성들이 신체적 위협이 적은 팬픽과 팬덤문화에 열광하는 것 역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조합이다.

첫 번째의 연대감은 그들이 시스템의 불안정성에 기민하게 반응(대응이 아니다!)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녀들은 이 시스템 안에서 불안해하고,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청춘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시스템 내부가 아닌 외부를 고민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밝은 미래> 등 - 은 두터운 여성 팬층을 확보한다.

두 번째의 팬덤은 강한 남성성을 내뿜는 스타를 열망하는 것과는 진행 양상이 다르다. 일상의 이미지들이 폭력과 선정성으로 가득하다면, 종종 청춘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은 여성화된 혹은 팬픽의 주인공들이 되어 이미지를 향유하게 된다. 즉 그들은 응시하는 주체가 아닌 스스로를 응시의 대상으로 만든다.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 그의 이런 이미지는 <형사>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후 그가 출연한 드라마, CF, 영화들 중에서 그의 여성성을 부각시킨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작품, 예를 들어 <매직>과 같은 드라마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 슈퍼주니어를 주연으로 만든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 등이 그러하다.

 

노스텔지어적 청춘 / 소통하는 청춘

흔히 남자아이들의 청춘은 자신의 순수성에 대한 보상으로 설명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랬고, <내 청춘에게 고함>이 그러했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남성화된 시선(그리고 관객성)과 남성 제작자들 사이의 공모다. 그러나 여자 아이들의 청춘은 이런 노스텔지어적 청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태풍태양>의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길 희망하고, 현재와 투쟁한다. 좀 더 오래 전 <세 친구>들은 보이지 않는 미래와 남다른 자신들의 미래를 고민했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의 자기 반성을 위해 돌아봐야 하는 청춘이 아니다. 불안한 청춘의 이야기는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그 지점에서 ‘청춘’과 ‘여성관객’은 서로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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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수업을 위해 급조해서 글을 썼다. 다음 주면 드디어 종강.
불성실함에 대한 가책을 느끼며,
마무리만은 잘 해 보겠노라 뒤늦게 밤을 샌다.
세상에, 제대로 미리 하는 것이라곤 도대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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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1. No "Country"  (not "state")
2. For Oldman
3. Killing Machine
4. Undefended Violence

리뷰 업데이트 예정 : 금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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