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이태원 '버거킹' 살인사건을 영화화한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
이미 이태원의 그 버거팅은 없어져 실제 그대로의 재현은 어려웠을 것이고, 촬영에 선뜻 응해주는 동일 브랜드의 매장을 찾기는 어려웠겠지만, 간단하게 세트를 지어 예전의 그곳을 모방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이 영화에는 최근의 한국영화가 마치 그것이 영화의 완성도의 측도라도 되는 냥 내세우는 '공간의 완벽한 재현'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야 없다.
조금만 발품과 손품을 팔면 쉽게 구할 수 있었을 사건 수사 일지도 허술하고 - 물론 홍기선 감독은 그런 재현에는 원래도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긴 하다 - 당연히 자극적 소재로 선택당할 줄 알았던 '반미' 감정도 별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 사건이 TV에서 재현될 때 강하게 들이밀었던 '미국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약소민족의 설움' 같은 것은 이상하리만치 없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머니의 품안을 외쳐대던 '선택'의 홍기선 감독이 이번에는 피해자의 어머니를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머니가 주인공의 나르시시적 고향이 되지 않는 훨씬 더 담백한 영화를 만들었다.
왜 '버거킹'이라는 공간을 버렸을까? 이태원이라는 혼종성의 공간은 왜 홍대로 바꼈을까? 미군이었던 용의자들은 왜 혼혈과 어느 재벌 아버지를 둔 재미교포 2~3세 쯤으로 바뀌었을까? 영화는 사건의 본질을 계급문제와 인종주의로 환원시킨다. (물론 이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인데 한국인과 맥시코인의 혼혈인 미국계의 남자와 한국계의 남자 사이의 우열에서 한국계 남자가 더욱 우위라고 영화는 말한다.)
여기에 영웅 '검사'가 있다. 정재영이 분하는 이 영웅은 홀로 외로이 정의를 찾아 싸우지만 무엇이 정의인지 알지 못해 반신반의한다.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권력'에 의해 쉽게 무의로 돌아선다. 홍기선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영웅'인 주인공은 늘 고립되지만, 늘 홀로 독야청청 싸운다. 그러나 쉽게 승리하지 못한다. 영웅이지만 슈퍼맨이 될 수 없는 영웅들. 히키코모리의 영웅들. 그 영웅은 이번에는 미군이 아닌 '정의를 알 수 없는 시대'와 맞서 싸우고 이것을 비호하는 것은 유산계급과 권력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또다시 유예된다. 망망대해에 언제나 영웅은 홀로 싸우고 있다. 그것이 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이 지나간 후든, 포스트모던의 사회가 개인을 고립시키던 때든, 혹은 90년대 혼종성의 공간이 2000년대 자본과 정체성의 광포한 폭탄이 쏟아지고 있는 홍대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위치지운 그 지점은 지지를 보내주고 싶다. 비록 여전히 '영웅적 개인'은 지나치게 고지식한 면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 고립의 무게감이 다음에는 지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