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완결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구조를 짜는데는 결함이 있는 영화.
(아마도 이것보다 훨씬 더 긴 러닝타임을 필요로 했겠지만, 개봉을 위해 쳐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듯 하다. 감독판이 나온다면 이야기의 빠진 부분들이 분명 더 들어가겠지.)
영화는 법치권력, 미디어권력,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피해자가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남자는 평범한 남자였지만,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일약 유명인사가 되지만 결국 그가 믿었던 미디어에 다시 배신을 당하게 되면서, 영원히 도망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
그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은 그에게 "도망가다 죽는 것은 도망가는게 아니야. 살아라. 도망가." 등의 말을 남긴다. 영화의 결말은 다른 영화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데, 그는 시스템에서 구원되기보다 시스템 밖으로 완전히 도망가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의문 하나. 이는 본 아이덴터티의 결말과도 비교해보아야할 것이다. )
맞서 싸우기엔 우린 힘이 너무 약하니, 시스템의 망에 걸려 들지 않도록 최대한 피하고 도망치고,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감독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있느냐. (의문 둘)
또한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가 자신이 구해 준 아이돌 스타와 잤는지를 물어본다. 이것은 미디어의 선정성을 담지하는 일반 시민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너무 자주 반복된다. (의문셋.)
사건을 푸는 키워드. 비틀스의 골든슬럼버. 황금빛 선잠이란 뜻으로, 가사 중에 "There is one way to go back home" 뭐, 대충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것만으로 이 노래가 이 사건의 핵심 키워드라고 하기는 어렵지. 다만, 이것은 굉장히 수사적인 것인데, 이 선잠이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넙죽 엎드려 있으렴. 으로 바뀔 수는 있겠지.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정서는 상당히 반동적일 수도 혹은 수세적일 수도 있을 터.
정리하면 골든 슬럼버는 "지금은 시스템을 이길 수 없어. 도망가. 도망가지 않으면 걸려들 수밖에 없어. 일단 살아 남아 있어. 그러면 너를 아는 누군가는 너를 승인해줄 거야... " 정도일까?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는 데는 동의. 하지만, 일단 살아남아 있는게 최선일까?는 부정적. 나를 아는 누군가의 승인 - 따윈 필요없어.
그러나 의문이 드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3D 안경을 쓰고 잠이 드는 것만큼 불편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신은 3D 안경을 쓴 채로, TV를 보다가 요리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가 장을 보고 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것은 우리가 기존의 아날로그 혹은 디지털 TV를 우리의 눈으로 관람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때"는 우리는 일상의 삶을 거스르지 않고서도 TV를 보는 것이 가능했다. TV를 보다가 잠깐 전화를 받고 다시 TV로 돌아오는 non-stop의 행위들 말이다. 하지만 3D 안경은 관람과 그 외의 행위(아마도 '현실세계'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와의 완벽한 단절을 요구한다. 3D 영화가 종종 테마파크에서 상영되었던 것처럼 (이것이 상영되는 극장은 '귀신의 집'과 유사한데, 둘 다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환상"을 체험한 뒤 기진맥진해진 채 다시 현실 세계로 빠져"나온다." ) 그것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break), 우리를 어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래서 3D 미디어는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는 경험이다.
다시 스윗홈의 거실로 돌아와보자. 일상의 침범은 그 검은 안경을 쓰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검은 안경은 좋은(선명한) 이미지와 나쁜(흐릿한) 이미지를 구분하고 걸러주는 일종의 조리개이다. 여기에서 좋은 이미지는 3D 영상이고, 나쁜 이미지는 그 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다. 그러니 3D 영화가 자랑하는 리얼리티는 어불성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일상의 지각은 3D에 의해 끊임없이 침범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D는 당분간은 지속적인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공간으로 침투해 들어와 일상경험과 매체시각경험을 분리해내고 말 3D. 이것은 스마트폰이 일상으로 침투해들어온 것과 비교할 만하다. 대중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은 이제 대화 중에도 입과 귀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으되, 눈만큼은 스크린에서 떼지 않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만들어내었다. 귀와 입이 열려있다고 해도 머리가 열려 있는 것이 이 대화일지 화면 속 영상일지는 의심스럽다. 대화 상대가 온전히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만약 대화 참여자들 모두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행동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얼핏보면 그래서 스마트폰이 주체의 일상생활화 되어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스마트폰 유저들은 기존의 일상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3D 미디어와 스마트폰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개인을 개인의 일상생활 경험으로부터, 사회적으로 기획된 삶으로부터 개인들을 계속해서 분리시켜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통합의 감각보다 분리의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 대신 미디어 안에서의 내적 통합이 중요해진다. 우리의 두 눈은 분리된 두 개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해내야 하고, 한 스크린 위에 놓여있는 트위터 어플리케이션과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은 결코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필드 위에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감각 경험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혹은 그대로일까? 개인에게 분리와 통합의 감각은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결론을 내리거나 간과해버릴 수 없는 문제다.
여기에서 글을 마치고 싶진 않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좀 더 고민한 후에 후기를 추가하겠음.
수업 시간에 클립만 보고 나의 관심 주제인 전후 returning home과 nation building의 관계에 관한 영화인줄 알았으나 영화는 훨씬 더 경쾌하게 nation building의 문제를 가로지른다.
영화에서 카르멘은 도쿄에서 성공한 댄서로 어린 시절 집을 나간 후 몇 년만에 집으로 귀환한다. 그녀는 여러모로 영화 속 장님 오르간 연주자와 대비된다. 그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장님이 되었고 오르간을 연주하는 예술가이다. 영화 속 카르멘이 '저속한' 예술가로 묘사되고 개인적 영리를 위해 도망갔던 것과는 무척 대비적이다. 그러나 자칫 국가적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는 장님이 주축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카르멘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그녀의 공연이 성공리에 마을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승인을 득함으로써 카르멘은 개화되지 않고 그대로의 카르멘으로 남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교장으로 대표되는 국가는 불경스런 대중문화를 자신들의 자장 안으로 용인하고, 이 불경스런 예술에 동화된 못된 초기 자본가도 개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이 새로운 문화의 탄생마저도 포섭한다.
리터닝 자체가 현재를 바꾸는 것이다.
보통의 전후 영화들에서 리터닝한 사람들은 과거를 부인하고 과거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을 하는 반면, 이 영화에서 리터닝은 현재가 과거와 조화를 이루면서 유지된다. 오히려 과거는 언급되지 않고,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을 현재가 당차게 이끌고 나간다.
아시아에서 최초의 근대적 경험이라 할 만한 전쟁,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각 국가들이 어떻게 nation을 형성했는지 보는 것은 참 재미있다.
랩탑의 파워 켜는 일이 뭐 그리 힘들다고
집에 가면 멍하니 정규방송 다 끝난 텔레비전 켜놓고 케이블 예능 재방송을 즐겨보기를 반복하는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블로그를 개편할 예정인 바,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일기장으로 쓰고 이제 정말 그만.
1. 간밤의 꿈
나는 한 방송국의 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간이 침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늑하게 꾸며진 휴게실에 마련된 최첨단의 이동식 침대. 편안하게 잠이 들었는데 누가 곁에 다가와 나를 깨운다. "일어나, 이제 일어나야 돼."
비몽사몽 눈을 떴는데 한 친구가 침대에 걸터 앉아 등을 돌리고 짐을 싸고 있다. 잠결에 내가 말한다. "어디가?" 아무 대답이 없는 친구.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묘한 웃음을 짓고 있음이 틀림없다. "가지마." 그렇게 말하고 나는 친구의 어깨에 기대 이내 잠이 든다. 미동도 하지 않던 친구는 내가 잠이 깨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어깨를 흔들어준다. 그 어깨가 포근하다. 이게 사랑일까?
- 그러고선 바로 눈을 떴더니 젠장, 꿈이다. 그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는 누구였을까?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자기 직전에 바로 슈퍼스타K2 재방송을 봤더랬다. 이런. 이렇게 빠지는군하.
2. 지난 경과
학생과 선생의 적대는 늘 선생의 권위주의로 끝나버리고 만다. 어느 순간 갑도 아닌 을도 아닌 중간자의 역할에 있다보니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어쨌거나 나는 을보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가정된다. 그래서 을은 늘 피해자가 된다. 나는 갑이 아니지만 을도 아니다. 젠장. 갈수록 외롭군. 이렇게 말하면 넘 꼰대같다. 하지만 정말 외롭다. 다시 학생이 되고 싶은 건 단지 그 이유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본 단편영화들, 그 중에서도 특히 20대가 만든 영화들에서 주로 보았던 것. (20대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대부분의 사람이 20대였다는 점) - 이유없는 폭력! 취직이 안 된다고 누군가를 찌르고, 실연을 당해서 누군가를 찌르고, 못난 부모라서 찌르고... 대다수의 경우는 그러한 폭력의 끝은 상상이었다는 것. 어찌하여 20대의 상상은 '불특정 다수'에게 화가 나 있고, 조금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절망의 끝으로 치닫고 있는가?
사회적 적대에 대한 단상2.
사회적 유명 인사에 대한 무한 분노. 혹은 강남권에 대한 야유, '진보'라는 이름으로 - 최소한의 '계급의식'이라는 이름으로 -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공격들.
맑스는 자본주의가 최절정에 달하면, 계급적대 역시 첨예화되고, 이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PT 독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그러하고,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계급적대가 아직 첨예화 되지 않은 탓일까? 혹은 온전히 사라진 것일까? 절망스런 상상력이 20대를 규정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분명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계급적대와 또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우리 사회의 계급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급의 해체와 재구성. Class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계급의식이 부재한 것일까? 단지 계급의식의 고양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가? no!
현재적 의미의 Class의 구성. 그리고 이것이 관객성(대중)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관객성의 조건.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등장. => Spec 쌓기!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적 적대를 생산해내고, 대중문화 담론을 이끌어가는 세대들.
자본재의 소유 유무에서 계급이 결정되고, 맑스적 의미에서 쁘띠 브르주아,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제 3심급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의식하는 비노동주체들(잉여주체), 혹은 비노동성, 잉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는 변방에 존재하고 스스로 '마이너리티' 혹은 '루저'라고 부르는 이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낡은 테제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선 더 이상 '마이너리티 인지'가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대안적 상상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