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의 배신에 질려서 국가에 스스로 감금당해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복수와 배신은 거듭되고, 더 이상 의리와 신뢰도 없고, 명분도 없으며
그래서 명분보다 길게 사는 것을 선택해도, 어느 장소도 안전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완전히 봉쇄된 출구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섬뜩했던 영화.
이동승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다. 성룡의 액션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이 영화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처음엔 주인공(성룡)이 너무 착해서 다소 느슨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그가 참...
하지만 중반에 법적 신분(외국인 허가증?)을 획득하기 위해 법을 위반하는 장면부터는 조금 속도가 붙었고, 그의 동생의 복수를 위해 달리는 장면, 신주쿠의 다른 조직세력으로부터 공격 당하는 장면 등은 장르적으로 탁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은 끝까지 착한 캐릭터를 버리지 않았고, 다케나카 나오토는 무슨 키다리 아저씨 마냥 성룡의 주위를 맴돌면서 성룡을 지켜주려 하고 있고, 죽어가던 성룡의 대사가 다케나카 나오토에게 들리지 않음으로써 절정의 신파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게 이 장면은 몹시 처연하다. )
신주쿠는 다른 액션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홍콩의 침사추이처럼) 일본 야쿠자 조직에겐 몹시 중요한 공간이다. 여기에 이민족이 들어가서 이 공간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공간의 성격이 완전히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 자체가 내셔널 vs 내셔널의 대당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다. <정무문>에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을 깨부수고 들어가던 이소룡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성룡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가부장제의 억압에 극단적으로 시달리는 한 여성의 복수 이야기가 메인 플롯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정말로 감독이 비판하고 싶었던 것은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가 아니라 많은 저널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나중에 찾아보니 그랬다.) 방관자 쪽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관자가 누구이냐가 이 영화에서는 몹시 문제적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복남의 어린시절 서울 친구로 등장하는 이 방관자는 도시에 사는 싱글녀이다. 그녀는 제법 사는 것 같고,(그녀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이나, 죽은 외할아버지의 집을 처분하지 않고 사는 것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는 폭행 사건을 목격했지만, 휘말리고 싶지 않아 성의없는 증언을 한다. 이는 후반부에서 복남의 딸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다시 한 번 부인하는 데서 반복된다. 그래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복남은 결국 살인의 화신이 되고 만다.
이 영화의 장르적 짜임새의 불충실함(특히, 후반부의)은 논외로 차치하고서, 이 영화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적으로 좀 더 정교하게 논의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비판받아야 한다.
우선 영화의 이야기는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가정 폭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영화는 사람이 몇 살지 않는 섬마을에, 섬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는 복남을 위치시킨다. 아마, 그녀의 부모나 다른 가족 관계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복남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한 장치였으리라. 그래서 복남의 플롯만 전개된다면, 6,70년대에 자주 등장했던 여귀물의 고어버전 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하나의 플롯을 덧댐으로써, 방관하고 있었던 '그녀'를 비판한다. (이것은 이미 <오로라 공주>에서 시도되었었던 것이므로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복남에겐 도움을 청할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고, 복남은 '그녀'에게 죽어라 구원의 편지와 전화를 건넸지만, '그녀'는 복남을 귀찮아했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건 그녀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은행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할머니의 대출을 거부한다. 다른 회사 동료가 해결한 걸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였겠지만, 그녀는 귀찮음에 해결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원리 원칙을 잘 따르기 때문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음에 분명하다.) 할머니와의 말다툼에서 그녀는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히스테리적 반응 때문에 동료의 뺨을 때린 후 회사를 잠시 떠나 섬에 들어가게 된다. 즉, 그녀의 성격이 히스테리적이라는 정보가 하나 관객에게 추가된다. 그런 그녀가 복남의 진짜 가해자들보다 더 문제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그래서 관찰자이고 관객인 그녀. 그녀만이 죄의식에 사로잡힌다고 햇을 때, 그래서 그녀의 위치에 놓여진 관객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을 때, 무엇이 정말 문제적인가? 진짜 가해자들은 죽음으로써 사건에서 자유로워졌다. (복수의 완성형. 그들은 처벌받았고 그래서 더 이상 위협의 대상도 원망의 대상도 아니다.)
유일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 여성.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극히 도시적이며, 지극히 현대적인 이 여성과 지극히 촌스럽고, 지극히 자애로우며, 지극히 전근대적인 이 여성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후자 쪽이다. 가부장제에서 고통받았지만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모성을 다한 복남은 살인마로 변하지만, 서사 구조상에서 용서받는다면, 그 친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물론 관객은 그녀의 위치에 놓여지기 때문에 살아남았음에 안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복수를 다루었던 6,70년대 호러물이나 살인(혹은 유기)에서 불특정 다수의 방관자의 위치를 사회구조적으로 문제제기했던 <오로라 공주>와는 달리 이기적이고 잘 나가는 현대 도시의 싱글녀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증으로 읽힌다.
힘든 사람이 있어도 도와주지 않는 그녀. 폭행사건을 보아도 침묵하는 그녀. 복남의 시고모의 말처럼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시골와서 쉬겠다고 내려와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코 젠더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방관자가 누구이냐가 이 영화에서는 몹시 문제적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복남의 어린시절 서울 친구로 등장하는 이 방관자는 도시에 사는 싱글녀이다. 그녀는 제법 사는 것 같고,(그녀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이나, 죽은 외할아버지의 집을 처분하지 않고 사는 것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는 폭행 사건을 목격했지만, 휘말리고 싶지 않아 성의없는 증언을 한다. 이는 후반부에서 복남의 딸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다시 한 번 부인하는 데서 반복된다. 그래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복남은 결국 살인의 화신이 되고 만다.
이 영화의 장르적 짜임새의 불충실함(특히, 후반부의)은 논외로 차치하고서, 이 영화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적으로 좀 더 정교하게 논의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비판받아야 한다.
우선 영화의 이야기는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가정 폭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영화는 사람이 몇 살지 않는 섬마을에, 섬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는 복남을 위치시킨다. 아마, 그녀의 부모나 다른 가족 관계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복남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한 장치였으리라. 그래서 복남의 플롯만 전개된다면, 6,70년대에 자주 등장했던 여귀물의 고어버전 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하나의 플롯을 덧댐으로써, 방관하고 있었던 '그녀'를 비판한다. (이것은 이미 <오로라 공주>에서 시도되었었던 것이므로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복남에겐 도움을 청할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고, 복남은 '그녀'에게 죽어라 구원의 편지와 전화를 건넸지만, '그녀'는 복남을 귀찮아했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건 그녀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은행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할머니의 대출을 거부한다. 다른 회사 동료가 해결한 걸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였겠지만, 그녀는 귀찮음에 해결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원리 원칙을 잘 따르기 때문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음에 분명하다.) 할머니와의 말다툼에서 그녀는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히스테리적 반응 때문에 동료의 뺨을 때린 후 회사를 잠시 떠나 섬에 들어가게 된다. 즉, 그녀의 성격이 히스테리적이라는 정보가 하나 관객에게 추가된다. 그런 그녀가 복남의 진짜 가해자들보다 더 문제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그래서 관찰자이고 관객인 그녀. 그녀만이 죄의식에 사로잡힌다고 햇을 때, 그래서 그녀의 위치에 놓여진 관객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을 때, 무엇이 정말 문제적인가? 진짜 가해자들은 죽음으로써 사건에서 자유로워졌다. (복수의 완성형. 그들은 처벌받았고 그래서 더 이상 위협의 대상도 원망의 대상도 아니다.)
유일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 여성.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극히 도시적이며, 지극히 현대적인 이 여성과 지극히 촌스럽고, 지극히 자애로우며, 지극히 전근대적인 이 여성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후자 쪽이다. 가부장제에서 고통받았지만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모성을 다한 복남은 살인마로 변하지만, 서사 구조상에서 용서받는다면, 그 친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물론 관객은 그녀의 위치에 놓여지기 때문에 살아남았음에 안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복수를 다루었던 6,70년대 호러물이나 살인(혹은 유기)에서 불특정 다수의 방관자의 위치를 사회구조적으로 문제제기했던 <오로라 공주>와는 달리 이기적이고 잘 나가는 현대 도시의 싱글녀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증으로 읽힌다.
힘든 사람이 있어도 도와주지 않는 그녀. 폭행사건을 보아도 침묵하는 그녀. 복남의 시고모의 말처럼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시골와서 쉬겠다고 내려와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코 젠더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가 될 수 없다.
흑사회 2를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흑사회 2가 상하이로의 이동을 통해 새로운 시장의 형성 과정의 체현을 다루고 있었다면, 흑사회는 침사추이를 장악한 조직의 전통과 형제애, 암투가 다루어지고 있다. 97년의 홍콩 반환 이후에도 홍콩은 그리 달라보이는 것이 없다. 조폭이던 친구가 알고보니 경찰이었다는 것 정도? 이제 경찰은 더 뻔뻔하게 경찰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Triad는 여전히 조직의 전통을 고수하고, 경찰이 떨어져나갔다는 것 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경찰은 그들을 이제 암적인 존재로 취급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제력은 막강하고, 그들이 가진 전통은 확고하다. 그래서 이 모든 영화적 순간들은 흑사회 300여년의 역사와 의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몰아가는 듯 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조직의 회장으로 선출된 록은 회장직을 둘로 하면 어떻겠냐는 Big D와 이를 목격한 그의 아내를 무참하게 죽인다. 그것이 조직을 지키기 위함인지 혹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함인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후자에 가까워보인다. 이 애매모호함이 이 영화의 결을 훨씬 두텁게 만든다. 의리, 혹은 정의란 없다는 것을 단 1분이라는 순간 안에 순식간에 해치워버린다. 사실 그래서 이 지점이 조금 배반스럽기도 하다. (아직은 판단 보류라는 뜻). 삼합회가 더 이상 갱단으로서의 의미보다 지하 경제를 움직이는 자들로서 의미가 좀 더 있다면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완전한 도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홍콩반환 이후의 홍콩은 그처럼 더욱 잔인하고, 겉으로는 명예로움과 의리를 지키려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내가 살아야한다는 강한 강박이 존재하는 듯 하다. 자기가 공들여 쌓아올린 것을 스스로 여지없이 부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놀랍다.
두기봉 감독의 최근작 <참새>(2008)와 <복수>(2009)는 <익사일>(2006)에서 시작해 과히 두기봉의 액션 영화의 hyper-excessive style 의 백미라 할만하다. "포즈의 미학"은 더욱 두드러졌고, 필름 누와르, 히치콕식 서스펜스, 빌리 와일더 식 유머, 자크 드미의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르의 오마주로 넘쳐 흐르는 <참새>와 대놓고 장 피에르 멜빌에 대한 오마주로 제작된 <복수>. 두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할리우드와 유럽을 아우르는 두기봉의 영화 내공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알 수 있다. (그에게 자신 세대 이전의 홍콩 영화는 그리 남아 있지 않은 듯 하다. )
<참새>는 두기봉의 최근 액션 영화 중에 마카오 (혹은 상하이) 가 등장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영화인 대신, 홍콩의 거리 구석구석 낡은 공간들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반면 <복수>는 마카오와 홍콩을 오가는데, 마카오에서 눈에 띄는 몇몇 공간들은 실외 세트로 이루어져 있는 듯 하고, 홍콩으로 넘어왔을 때의 공간 묘사는 그리 상세하지 않다.
암튼 두 영화를 한 번에 본 관계로 계속 비교하게 되는데, 이제 비교는 생략하고 각자 영화로 들어가보면.
<참새>는 예의 산책자의 시선으로 풍경을 누비고, 또 복잡한 거리에서 길을 잃고 하는 식으로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 과히 오우삼의 <와호장룡>의 대나무숲 액션을 보는 듯한 우아함과 정교함에 더해 절제미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들어가는 거리의 소매치기 쇼부는 너무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니 생략. (하지만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그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모 평론가의 글에는 실망.)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렵지만, 장르적 실험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엔 미약. 풍경을 제시하는 영화라는데는 동의할 수 있음.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통틀어 얘기하기는 어려움.
<복수>는 과잉된 스타일을 생각하자면 좀 힘든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완전 좋음. "정작 당사자는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우린 해야 해." 라던 부분. 그리고 자신의 잃은 기억을 대신 기억하여 죽은 자들을 위해 거의 영적으로 기억을 되찾은 후(그들이 얘기를 해줄 수 없으니, 남자는 영적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 완전 빵 터졌지만 완전 대단했던 장면.) 그 갚음을 하던 부분은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에 가서 자신의 기억을 벽 속에 말하고 묻어버린 것에 대한 화답처럼 들려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장면. 누군가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도와 연대의 모티브라는 점에서 너무 좋았다.
In addition, the main French character were losing his memory about his vengeance, while smiling in the last scene of the film. The man who wanted to protect their promise with him disappeared and the man's memory was also disappearing. Even though his memory and friends did not exist any more in the real (and they knew that.), their actions were not meaningless. In Johnnie To's films, frustration happened repeatedly. However, these frustration does not mean any gap(positively) or permanent ending(negatively) to me. Rather I believe that this means an electron escaped illegally out a closed circuit. This electron does not show up its power but the frequency of this escape makes the closed circuit changed temporally because the elctron makes another electronic field momently.
<참새>는 두기봉의 최근 액션 영화 중에 마카오 (혹은 상하이) 가 등장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영화인 대신, 홍콩의 거리 구석구석 낡은 공간들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반면 <복수>는 마카오와 홍콩을 오가는데, 마카오에서 눈에 띄는 몇몇 공간들은 실외 세트로 이루어져 있는 듯 하고, 홍콩으로 넘어왔을 때의 공간 묘사는 그리 상세하지 않다.
암튼 두 영화를 한 번에 본 관계로 계속 비교하게 되는데, 이제 비교는 생략하고 각자 영화로 들어가보면.
<참새>는 예의 산책자의 시선으로 풍경을 누비고, 또 복잡한 거리에서 길을 잃고 하는 식으로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 과히 오우삼의 <와호장룡>의 대나무숲 액션을 보는 듯한 우아함과 정교함에 더해 절제미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들어가는 거리의 소매치기 쇼부는 너무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니 생략. (하지만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그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모 평론가의 글에는 실망.)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렵지만, 장르적 실험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엔 미약. 풍경을 제시하는 영화라는데는 동의할 수 있음.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통틀어 얘기하기는 어려움.
<복수>는 과잉된 스타일을 생각하자면 좀 힘든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완전 좋음. "정작 당사자는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우린 해야 해." 라던 부분. 그리고 자신의 잃은 기억을 대신 기억하여 죽은 자들을 위해 거의 영적으로 기억을 되찾은 후(그들이 얘기를 해줄 수 없으니, 남자는 영적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 완전 빵 터졌지만 완전 대단했던 장면.) 그 갚음을 하던 부분은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에 가서 자신의 기억을 벽 속에 말하고 묻어버린 것에 대한 화답처럼 들려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장면. 누군가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도와 연대의 모티브라는 점에서 너무 좋았다.
In addition, the main French character were losing his memory about his vengeance, while smiling in the last scene of the film. The man who wanted to protect their promise with him disappeared and the man's memory was also disappearing. Even though his memory and friends did not exist any more in the real (and they knew that.), their actions were not meaningless. In Johnnie To's films, frustration happened repeatedly. However, these frustration does not mean any gap(positively) or permanent ending(negatively) to me. Rather I believe that this means an electron escaped illegally out a closed circuit. This electron does not show up its power but the frequency of this escape makes the closed circuit changed temporally because the elctron makes another electronic field momently.